
1. 시작하며: 꽉 찬 영화관, 그리고 탄식
쉬는 날을 맞아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요즘 극장가가 한산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영화 <만약에 우리>를 보러 온 관객들로 상영관이 가득 차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딘가 익숙한 아련함이 느껴졌다. <건축학개론>이 떠올랐다. 같은 건축을 소재로 다루는 점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선배’ 연적의 존재도 그렇고, 결국 첫사랑인 주인공들이 맺어지지 못한다는 결말이 주는 씁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첫사랑의 설렘보다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부서져 버린 관계의 파편들을 더 아프게 조명한다.
2. 줄거리: 미숙했던 우리, 잔인했던 계절
첫 만남 버스에서: 갓 성인이된 정원이의 센패션이 눈에 띈다.
영화는 고된 서울 살이를 하며 꿈을 키우는 두 청춘, 정원(문가영)과 은호(구교환)의 이야기를 그린다.
반복되는 상처와 미숙한 도피
관객들의 탄식이 터져 나온 장면이 있다. 정원이 자신을 무시하는 부유한 선배에게 다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선배의 어머니로부터 가정환경을 들먹이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선배가 내민 목걸이 하나에 용서를 받아주고 다시 차에 타는 정원. 바로 옆에 은호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불안정한 삶을 지탱해 줄 동아줄을 놓지 못하는 처절함처럼 보여 가슴이 아팠다.
결국 12월 31일, 선배에게 두 번째 상처를 받고 돌아온 정원은 술김에 은호와 밤을 보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정원은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갓 성인이 된 남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감정과 상황들. 전화를 받지 않는 정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은호의 모습에서 그 시절 우리의 미숙함이 겹쳐 보여 마음이 먹먹했다.
“너랑 헤어지면, 돌아갈 곳이 없어지잖아”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정원이 은호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영화의 핵심을 관통한다. 보육원에서 자란 정원에게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임시 거처가 아닌, 온전한 내 편이 있는 곳. 정원에게 은호는 곧 ‘집’이었다. 하지만 그 집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그녀의 결핍은 영화 내내 위태롭게 흔들린다.
3. 꿈과 현실의 괴리: 흑백이 되어버린 세계
행복했던 동거 생활도 잠시,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은호는 게임 개발이라는 꿈을 꾸지만, 아버지의 병환, 치솟는 전세금, 그리고 정원의 건축사 공부 뒷바라지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힌다. 결정적으로 성공한 동창을 만나 경제적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날, 은호의 열등감은 폭발하고 만다.
서로를 위해 참았던 말들이 오히려 독이 되어 서로를 찌르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이별 후 은호는 절치부심하여 게임 개발에 성공해 부와 명예를 얻지만, 정원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4. 연출의 미학: 색(Color)을 잃다
이 영화의 편집 방식은 꽤 독특하다.
보통 과거를 흑백, 현재를 컬러로 표현하는 클리셰를 비틀어 과거를 찬란한 컬러로, 현재를 무채색의 흑백으로 보여준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영화 중반부 은호가 만든 게임의 설정을 듣는 순간 알게된다.
“게임 속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잃으면, 세상의 모든 색을 잃어버리게 돼.”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서로를 잃어버린 후, 은호와 정원의 삶은 흑백이 되었다. 현재 시점, 비행기 연착으로 우연히 같은 호텔에 묵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은호에게는 이미 자신의 게임을 사랑해 주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그 잔인한 현실을 마주한 정원은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온다.
5. 맺음말: 가지 않은 길
결말부에서 정원은 결국 건축사가 되어 그토록 원하던 자신만의 ‘집’을 짓는다. 하지만 그 공간에 은호는 없다. 은호는 가정을 꾸리고, 정원은 집을 가졌지만, 둘이 함께 그리던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영화를 보며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올랐다. “만약에 우리,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우리는 해피엔딩이었을까?”
영화는 끊임없이 ‘만약(If)‘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더 미련이 컸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했던 두 사람. 비록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정원의 마지막 대사는 긴 여운을 남긴다.
“그 시절 나의 집이 되어줘서 고마워.”
서로는 엇갈렸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그 시절. <만약에 우리>는 가장 뜨거웠고 가장 아팠던 청춘의 한 페이지를 적나라하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복기해 주는 영화다.
헤어져도 같이하자던 약속은
창문으로 갈라진 것 같은 현실이 됐다
P.S. 영화가 남긴 사소하지만 진한 여운들
1. 현실적인 의문: 굳이 그 구조여야 했을까?
영화를 보면서 직장인으로서, 혹은 성인으로서 현실적인 안타까움이 들었던 장면이 있다. 바로 그들의 반지하 자취방이다. 극 중 두 사람은 거실과 방이 분리된 구조를 고집하며 반지하를 택한다. 물론 ‘번듯한 집’의 형태를 갖추고 싶었던 그들의 자존심은 이해한다. 하지만 볕 안 드는 그곳에서 서로에게 짜증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면적을 줄이고, 방이 하나더라도 지상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햇빛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포기하면서까지 ‘방과 거실의 분리’라는 형식을 쫓았던 그들의 선택이, 마치 내실보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다 무너져버린 그들의 연애 방식 같아 더 안타까웠다.
2. “내가 더 잘해줄게, 심장도 나눠줄게”
은호가 정원에게 매달리며 했던 대사. “내가 더 잘해줄게. 심장도 나눠줄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몸뚱이와 마음뿐이라서 할 수 있었던 가장 처절하고도 순수한 고백.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이 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저토록 사랑해서, 내 생명과도 같은 심장마저 나눠주겠노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뜨거운 사랑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