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FMOMA의 오픈런, 뜻밖의 전채요리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을 찾은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쿠사마 야요이의 특별전은 놓치고 싶지 않은 이벤트였다. 특히 사진으로 보았던 신작
제대로 감상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오픈런(Open Run)’이다.
나와 여동생은 미술관 문이 열리자마자 전시실로 향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먼저 마주한 건 노란색 물결이 치는 공간이었다.
Aspiring to Pumpkin’s Love, the Love in My Heart (2023)
(호박의 사랑을 갈구하는 내 마음)
익히 알던 땡땡이 호박 무늬였지만, 둥근 호박이 덩그러니 놓인 게 아니었다. 벽면을 타고 굽이치는 거대한 파도처럼, 혹은 공간을 휘감는 커튼처럼 유려하게 뻗어 나가는 곡선. 호박을 해체하여 공간 전체에 펼쳐놓은 듯한 기묘한 조형미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나는 서둘러 다음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 내가 기다렸던 빛, 그리고 깨져버린 정적
드디어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환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Dreaming of Earth’s Sphericity, I Would Offer My Love (2023)
(지구의 둥근 모양을 꿈꾸며, 나는 사랑을 바치겠다)
오픈런을 한 덕분에 텅 빈 전시실에는 딱 우리 둘뿐이었다. 투명한 아크릴과 둥근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색색의 빛들이 공간을 부유한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쏟아지는 빛들이 내 몸 위로, 바닥 위로 흩뿌려지며 현실의 감각을 지워버리는 느낌.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동생과 나는 숨소리조차 줄이며 그 빛의 우주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관람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번에 10명 남짓씩 입장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확실히 처음에 느꼈던 그 압도감이 덜했다.
빛과 점(Dot)이 주는 무한한 확장성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고요함이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들어차자 신비로웠던 우주는 순식간에 평범한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만약 이 작품의 진가를 느끼고 싶다면, 무조건 오픈런을 추천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그녀가 ‘색감을 참 잘 쓰는, 빛을 잘 다루는 팝 아티스트’라고만 생각했다.
3. 자기 소멸(Self-Obliteration): 공포를 지우는 의식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정신질환과 싸워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SFMOMA에서의 화려했던 기억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겪은 환각 증세. 세상이 온통 점으로 뒤덮여 자신을 삼키려 한다는 공포. 그녀에게 그 수많은 점(Dot)을 찍는 행위는 예술이기에 앞서, 환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자기 소멸’의 의식이자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제야 초기에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이해가 갔다. 이불(Lee Bul) 작가의 초기 소프트 조각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쿠사마의 초기작인 ‘성기 시리즈’나 남근 형상 작품들은 날 것 그대로의 충격이었다. 혐오스럽거나 두려운 대상을 수없이 반복해 만듦으로써 공포를 지워버리는 그녀만의 투쟁 방식.
그 치열함에 나는 단순히 ‘예쁘다’를 넘어선 경외감을 느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4. 프리즈(Frieze)에서 만난 반가운 변주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작품을 찾는 여정은 계속되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나 키아프(Kiaf)를 갈 때마다 쿠사마의 호박 시리즈를 만나면 낯선 파티장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기존의 노란 호박을 비틀어낸 변주들이었다.
- 구멍 뚫린 은색 호박: 차가운 메탈 소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주변 풍경을 기묘하게 반사하던 작품.
- RED-NETS MPOG: 끝없이 반복되는 붉은 그물망 그림. 붓으로 하나하나 찍어 나갔을 그 무한한 시간과 집착이 느껴져 숨이 막힐 듯 매혹적이었다.
5. 파라다이스 시티, 그리고 나의 소망
그토록 날 선 투쟁 끝에 작가가 도달한 것이 가장 둥글고 넉넉한 형태인 ‘호박’이라니. 공포의 대상이었던 점무늬가 호박을 만나 비로소 ‘귀여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따뜻하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호박은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로비(WOW Space)에 있다.
Great Gigantic Pumpkin
(거대한 호박)

한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그녀의 노란 호박을 만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졌다.

이름 그대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노란 호박. SFMOMA의 고요했던 노란 파도와 프리즈의 세련된 은색 호박을 거쳐, 이곳의 거대 호박 앞에 서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집에 이 호박 하나쯤 있으면 참 좋겠다.”
단순한 소유욕이 아니다. 치열한 삶의 고통을 둥글게 감싸 안아줄, 단단하고 귀여운 위로가 내 공간에도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