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AI 부역자인가, 켄타우로스인가? - 엔지니어가 읽은 <트렌드 코리아 2026>

[Book] AI 부역자인가, 켄타우로스인가? - 엔지니어가 읽은 <트렌드 코리아 2026>

트랜드 코리아2026

나는 현재 AI 반도체 팹리스 회사인 ‘리벨리온’에 다니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스스로를 ‘인류에게 인공지능 보급을 가속화하는 AI 부역자’라고 칭하곤 한다.

세상은 AI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기대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최근 출간된 <트렌드 코리아 2026>을 읽으며, 특히 ‘휴먼인더루프(Human-in-the-loop)’라는 키워드 앞에서 내가 만드는 이 기술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칼자루를 쥔 자의 책임

흔히 기술의 ‘가치 중립성’을 이야기할 때 인용되는 오래된 비유가 있다. 바로 ‘칼’이다. 탈무드에 나오듯, 칼은 요리사의 손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악한 마음을 먹은 자의 손에서는 흉기가 된다. 도구는 죄가 없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을 뿐이다.

AI 반도체를 만드는 나 또한 매일 이 질문과 마주한다. 내가 설계하는 이 칩(Chip)은 세상을 바꿀 엄청난 속도를 제공하지만, 나는 이 기술 자체의 선악을 규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대장장이처럼,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효율적인 ‘칼’을 연마할 뿐이다. l 결국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이 압도적인 성능의 도구로 인류를 위한 성찬을 차려낼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겨눌 것인가. 그 선택은 AI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멋진 신세계’와 제로클릭의 그늘

하지만 엔지니어로서의 낙관론 이면에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느끼는 불안함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보면, 모든 불쾌한 감정은 거세되고 오직 행복한 감정만 남겨진 세상이 그려진다. 나는 그 묘사가 말 그대로 ‘죽어있는 세상’ 같다고 느꼈다.

책에서 언급한 ‘제로클릭(Zero-click)’ 트렌드처럼, AI가 점점 발전하면 우리는 검색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의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영상만 추천하고 있다. 고전적인 미디어가 제공하던 ‘데스크의 편집’이나 ‘균형 잡힌 시각’, 혹은 내가 몰랐던 대중의 인식을 접할 기회는 점점 사라질지도 모른다.

소비자들은 점점 더 입맛대로 콘텐츠를 취사선택하게 될 것이고,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달콤한 정보 속에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것이 내가 경계하는 AI 시대의 그늘이다.

글쓰기 격차와 생산성 혁명

얼마 전, 회사 테크라이터 지원님이 쓰신 글을 읽었다. 제목은 AI가 보편화될수록, 글쓰기 실력의 격차는 더 잔인하게 벌어집니다 였다. 나는 이 문장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나는 지금 이 블로그 글을 쓰면서도 AI의 도움을 엄청나게 받고 있다. 물론 AI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줘"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내가 쓰고 싶은 문장, 파편화된 아이디어, 강조하고 싶은 맥락을 AI에게 던져준다.

그러면 AI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내 생각들을 조율해 준다. “이 부분은 가독성을 위해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이 내용은 서론으로 올리는 게 더 임팩트가 큽니다.”

과거 학창 시절 신문사에 있을 때는 글 하나를 퇴고하는 데 며칠 밤을 새우곤 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글을 쓰는 직장인에게 그런 시간 투자는 엄청난 부담이다. 하지만 이제는 AI라는 도구 덕분에 1시간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생산성 혁명이다.

공급자인가, 소비자인가?

문제는 이 혁명의 과실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리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AI는 누구에게나 보편화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은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AI가 써준 글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AI가 제안한 초안을 다시 씹어먹고 내 입맛대로 취사선택하여(휴먼인더루프)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도 언급했듯,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콘텐츠 공급자인가, 소비자인가?” 그리고 “내가 AI를 도구로 부리는가, AI에 의해 내 생각이 재단되는가?”의 차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은 올해의 키워드로 ‘HORSE POWER’를 꼽으며, AI와 인간이 결합한 ‘켄타우로스’형 인재를 강조했다. 리벨리온에서 더 빠르고 강력한 AI를 만들면서, 나 스스로는 그 AI의 등에 올라탄 현명한 기수가 되고 싶다. 칼자루를 쥐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 말이다.


🔖 부록: 트렌드 코리아 2026 10대 키워드 (HORSE POWER)

이 글을 읽고 트렌드 코리아 2026의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책에서 제시한 10가지 핵심 트렌드를 정리해 둡니다.

1. 휴먼인더루프 (Human-in-the-loop) AI가 거의 모든 것을 생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인간의 판단과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진정한 우위는 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 위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깊이 사유하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

2. 필코노미 (Feelconomy) 제품의 성능이나 기능보다 소비자의 ‘감정’과 ‘기분’이 구매 결정의 핵심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 소비자들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점점 더 세밀하게 인식하고 구분하려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분은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었으며, 나아가 소비 행동을 추동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3. 제로클릭 (Zero-click) 소비자가 직접 검색하고 비교하는 시대가 저물고,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대로 소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나보다 나의 취향을 더 정확히 파악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일상을 채우고 있다. 사용자의 클릭 행위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이 현상은 소비 패러다임과 마케팅 전략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4. 레디코어 (Ready-core)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준비된 상태’가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무작정 뛰어들기보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자기주도학습과 선행학습 문화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게 ‘준비’는 단순한 대비책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핵심 태도이자 중요한 가치다.

5. AX조직 (AI Transformation Organization) AI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수직적 조직 구조가 해체되고 있다. 과거 계층과 부서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직은 프로젝트 기반의 유연하고 자율적인 형태로 전환되는 중이다. 극도로 평평한 조직 구조와 재능 있는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문제를 해결하는 협업 방식이 새롭게 자리 잡고 있다.

6. 픽셀라이프 (Pixelated Life) 시장은 빠르게 세분화되고, 사람들은 ‘작고 짧은‘ 단위로 삶을 소비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처럼, 현대인들은 하루하루의 작은 경험들을 촘촘히 쌓아 올려 자신만의 삶을 완성해간다. 대규모 투자보다는 작고 빠른 경험을 선호하며, 작지만 선명한 순간들을 모아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방식이 새로운 생활 철학으로 떠오르고 있다.

7. 프라이스 디코딩 (Price Decoding) 현대 소비자들은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을 파헤치는 분석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제품의 판매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원가 구조, 브랜드 프리미엄, 유통 마진 등을 꼼꼼히 따져보는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가격표에 담긴 각 요소를 분해해 자신이 지불하는 금액의 정당성을 스스로 검증하려는 초합리적 소비 패턴을 보인다.

8. 건강지능 HQ (Health Quotient) 단순한 장수를 넘어 ‘건강 수명’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적 능력(IQ)과 감성 지능(EQ)이 중요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건강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능력, 즉 ‘건강지능(HQ)’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건강 리터러시가 높아지면서, 정보의 양이 아닌 질적 판단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9. 1.5가구 (1.5 Households) 완전한 독립과 적절한 연결, 두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1.5가구’는 침해 받을 수 없는 개인의 자율성(1)을 지키면서도, 적당한 수준의 연결감(0.5)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일컫는 개념이다. 초솔로 시대의 고독과 경제적 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실용적 대안으로, 주거 시장과 공공 정책 영역에서 점점 더 주목받고 있다.

10. 근본이즘 (Returning to the Fundamentals) 정보 과잉과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시대, 사람들은 ‘원조’, ‘본질’, ‘진짜 가치’를 갈망하며 안정감과 진정성을 찾고 있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알고리즘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즉 변치 않는 ‘근본’을 향한 욕망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전적 가치와 믿을 수 있는 원조가 주는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